경찰박물관이 대한제국 시기 ‘항일 의병’을 ‘폭도’라고 지칭한 문건과 친일인사 이완용이 주도해 수여한 훈장을 전시해온 것으로 확인됐다. 박물관 측은 2005년 개관 당시 이 전시품을 넘겨받고도 최근까지 이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경향신문이 지난달 30일 방문한 서울 서대문구 경찰박물관 4층 ‘근대기 경찰’ 전시공간에는 박모 총순의 ‘지급증서’ ‘태극장’ ‘태극장 수여증’이 전시돼 있었다. 박물관 측이 적어둔 설명에는 1908년(융희 2년) 폭도를 진압하다가 순직한 고 박○○ 총순에게 지급된 태극장, 태극장 수여증, 유가족에게 금 팔백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의 지급증서라고 쓰여있었다. 총순(總巡)은 대한제국 시기 최하위 계급인 순사(순검) 윗 계급으로 지금으로 치면 파출소장에 해당한다.
3일 경향신문 취재결과 해당 설명이 지칭한 ‘폭도’는 항일 의병을 말한다. 호남지역 항일 의병 활동의 최고 권위자인 홍영기
인스타 좋아요 늘리기 전 순천대 사학과 명예교수(현 한국학호남진흥원장)는 경향신문 의뢰를 받아 대한제국 시기 관보와 순직자명부, 청의서, 황성신문 등 각종 기록물을 통해 박 총순의 존재를 확인했다.
박 총순은 1907년 9월12일 총순으로 승진해 전남 구례군 구례분파소(파출소)에 배속된 인물로 휘하에 헌병 보조원 몇 사람을 두고 있었다. 9월19일 헌병 보조원이 상급 헌병부대(순천분견소)의 철수 명령을 받고 떠난 뒤 혼자 남아있던 박 총순에게 일이 터졌다. 이 내용은 일제가 전남 일대에서 벌인 의병 진압 과정을 기록한 ‘전남폭도사’에 기록돼 있다.
9월19일 비도는 점차 증가하여 총원 40명으로써 구례분파소에 내습했다. 박○○은 혼자서 경계 중, 돌연 비도가 내습하여 응전할 경황이 없이 돌담을 넘어 달아나려고 했으나 총탄이 명중되어 죽었다.
여기서 말하는 ‘비도’(匪徒)는 지리산 일대에서 활약한 김동신 의병장의 부대를 가리킨다. 김 의병장은 당시 의병 활동 중심지였던 호남지역의 대표적 인물로,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이후 박 총순의 죽음은 도관찰사에 의해 ‘내부’에 보고됐다. 내부는 대한제국의 행정을 총괄하는 정부 부처였다. 내부는 박 총순의 죽음을 순직으로 인정하고 유족에게 구휼금 600원, 제사 비용 200원 등 총 800원 지급하기로 했다.
1908년 1월8일자 황성신문에도 박 총순을 비롯해 항일 의병에 죽임을 당한 이들에게 구휼금과 제사비를 지급할 예정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경찰박물관에 전시된 지급증서는 이 돈이 실제 지급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망한 박 총순은 약 3년 뒤 대한제국 멸망 전날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자두꽃)이 그려진 태극장을 수여받았다. 태극장은 대한제국 훈장 중 하나로 훈장 수여는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주도로 이뤄졌다. 이때 박 총순 등 훈장을 받은 이들은 의병과 싸운 공을 인정받은 일본인과 한국인 군경들이었다.
홍 전 교수는 친일 매국 정권인 이완용 내각과 일제가 시행한 태극장 수여는 식민지화에 앞장선 인물이나 의병과 싸우다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수여한 것이라며 마치 대한제국의 경찰로 근무하다 순직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부각하려는 듯한 잘못된 전시는 청소년들의 올바른 역사관을 왜곡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물관 측 관계자는 1980년대 경찰대에 유족이 기증한 물품을 2005년 경찰박물관 개관 때 넘겨받은 것이라며 대한제국 시기를 다룬 유일한 전시물이었고, 폭도가 누구를 가리키는지 배경에 대한 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경찰박물관은 경향신문 취재가 시작된 뒤 해당 전시물품을 철거키로 했다고 밝혔다.